천재와 불체자

정월 초에 C선배님께서 연하장을 보내주셨다. 카톡과 SNS가 난무하는 세상에 하얀 마분지를 손수 잘라 또박또박 예서체로 쓰셨다. 근하신년(謹賀新年). 참 오랜만에 보는 새해인사이다.

옛날 정초땐 서로 연하장을 주고받았다. 그 속엔 함박눈 덮인 초가집, 사립문엔 복조리가 걸리고 마당에선 아이들이 널을 뛰었다. 소박한 소묘 옆엔 근하신년이란 네 글자가 소반처럼 반듯했다. 그 글은 왠지 마음을 여미게 했다.

그 까닭을 이제야 알았다. 근(謹)은 삼가다, 조심하다는 뜻이다. ‘근하신년’이란 삼가 근신하는 마음으로 새해를 축하드린다는 말이다. 상투적인 인사치레가 아니라 지난해를 겸허히 반성하고 새해를 신중한 마음으로 맞이하자는 덕담인 것이다.

그런데 새해 벽두에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들을 반성케 하는 기사를 보았다. 미국의 불법체류 청년 추방유예 제도, 즉 다카(DACA) 해당자 한인 청년 P군이 지난 주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에 대한 보도였다. 그는 작년에 하버드 대학를 나와 세계적 명성이 높은 로즈장학생에 선발되었다. 외환 위기 당시인 7세 때 부모를 따라 미국에 와서 불안하고 열악한 환경을 딛고 다카 수혜자로서는 처음 로즈 장학생에 뽑힌 것이다.

다카는 2012년 오바마 전 대통령이 불법 이주한 부모를 따라 미국에 온 자녀들이 걱정없이 학교와 직장에 다닐 수 있도록 추방을 유예한 행정명령이다. 약 80만명이 혜택을 받는데 그들을 꿈꾸는 ‘드리머(dreamer)’라고 부른다.

그런데 트럼프는 집권 후 바로 다카 폐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그 청년들의 꿈과 미래를 정치 협상의 제물로 삼은 것이다. 이번 주 초엔 교착상태에 빠진 연방정부 셧다운 사태 타협안으로 장벽 건설 예산을 주면 다카를 3년 연장하겠다고 제안했다. 민주당은 청년들의 미래를 미봉책으로 호도하는 술책이라고 거부했다.

P군은 영예로운 로즈장학생에 선출된 것이 “달고도 쓴 소식”이라고 토로한다. 로즈장학생은 앞으로 2-3년간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일단 출국하면 다시는 미국에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불법 이민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미국에 살 수 없다고 기득권자들은 대못을 박고 있다.
그러나 위대한 미국의 건설은 창조적인 이민자들의 역할이 컸음을 아무도 부인 못한다. 아인슈타인을 비롯, 구글 창시자 설게이 브린, 테슬라 전기차를 만든 머스크, 언론인 퓰리처, 자연보호자 존 뮈어, 건축가 아이엠 페이, 에이즈 연구자 데이빗 호, 유튜브를 만든 카림과 첸 등 수많은 동서양 이민자들이 미국을 발전시켰다. 오히려 탈세나 러시아 결탁을 통한 선거 조작, 매춘 등 범죄성 불법은 트럼프 정치권에서 더 악취를 풍기고 있다.

그러나 어른들의 마음을 더욱 여미게 하는 것은 P군의 의연함이다. 그는 “내 지능이나 능력 때문에 미국에 체류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반대한다.”고 말한다. 두뇌나 경제능력만이 합법적인 미국인이 되는 조건이라는 편견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다.

오히려 부모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불법체류자가 되었지만 국민의 의무인 세금을 내며 미국에 능력껏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 참 시민의식이 아닌가, 그리고 어릴 때부터 미국인으로 커온 드리머들을 뿌리째 뽑아 제 3세계로 추방하는 것이 과연 기본 인권을 존중하는 미국적 가치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우리가 미국인으로서, 어떻게 인권을 중시하는 공동의 정체성을 소유한 사회를 만들 것인가”하는 명제를 연구할 것이라고 했다.

과연 미국은 공정한 사회인가? 이 땅에 이민으로 정착한 내가 지금 삼가 근신하는 마음으로 해야 할 일은 우선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미국 시민으로서의 소중한 권리를 쉽사리 포기하는 이기심, 나태함, 무관심, 무력감, 패배감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P군처럼 자랑스런 한인 ‘천재’들이 이 땅에서 불체자의 굴레를 합법적으로 벗을 수 있도록, 인권 존중의 미국을 염원하는 그의 순수한 꿈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한 표를 행사하고 함께 소리를 모아 대변하는 것이다.

글/김희봉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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