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전투서 패배한 트럼프, 전쟁은 이길까?

트럼프가 국경에서 적발된 밀입국 가정의 어린이들을 부모로부터 격리하는 정책을 철회하자 민주당은 쾌재를 불렀다. 충분히 그럴만하다: 부모와 자녀를 격리하는 것은 야비할 뿐 아니라 불필요한 정책이다.

그러나 아동격리 소동이 진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을까? 이번 이슈와 관련,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그의 지지자들에게 강력한 이민정책을 계속 추진해 나갈 것이라는 분명한 신호를 보냈다.

대통령의 잔인성(cruelty)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민정책에 반대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실수에 마냥 들떠 있다간 민주당 역시 덫에 치일 수 있다.

이보다 더 큰 질문이 무엇인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미국은 기존의 이민법을 그대로 집행해야 하는가, 만약 누군가 이를 교묘히 피해간다면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해 난민신청자들이 가장 많이 몰려든 최종 목적지였다. 그리고 이들 중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남미인들의 수는 44%가 늘어난 14만 명에 달했다.

데이빗 프럼은 애틀랜틱지에 기고한 글에서 대부분의 중남미 난민은 (점차 기세가 떨어지고 있는) 폭력보다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미국으로 오고 있으며, 아마도 처벌을 피하기 위해 아이들을 대동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풀이했다.

바로 이 때문에 힐러리 클린턴은 지난 2014년 수 만 명의 중남미 어린이들이 국경으로 몰려든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야한다: 아이들 홀로 국경 너머로 보냈다고 해서 그들이 그대로 머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미국의 국법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메시지, 혹은 더 많은 아동들이 위험한 여행에 나서도록 부추기는 메시지를 전달해선 안 된다.”

이민은 큰 그룹에 속한 미국인들에게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는 이슈로 자리매김했다. 그 이유 중 일부는 인종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일종의 고양된 민족주의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걷잡을 수 없는 세계화의 시대에 사람들은 아직도 그들이 안정성과 통제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민족주의는 지난 수세기 동안 이어져 내려왔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는 유일한 독트린이다.

20세기의 최대 화두는 신앙의 상실이다. 급속히 위세를 떨친 과학과 사회주의, 그리고 세속주의 사이에서 사람들은 교리(dogma)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종교의 본분을 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깊은 감정적 유대를 이룰 수 있는, 무언가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을 원하는 인간의 현실에 변화가 온 것은 아니다. 강력하고도 신비로운 유대감을 자아내는 민족주의는 우파에 속한 많은 사람들에게 바로 그 무엇의 대체물이 되어주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왼쪽 진영에 서있는 많은 이들에게 민족주의는 임의적인 경계를 공유하는 어떤 한 그룹의 사람들에 대한 비이성적인 친밀감에 가깝다. 도대체 왜 뉴햄프셔의 독실한 가톨릭 교인은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 사는 캐나다의 가톨릭 교도보다 2,500마일이나 떨어진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극렬한 무신론자에게 더욱 밀접한 관련성을 느끼는 걸까?

그러나 바로 이것이 민족주의가 지닌 힘이었고, 앞으로도 민족주의라는 이념은 용기와 충성심, 잔인함과 증오로 가득 찬 근사한 행위를 취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

이민은 민족주의의 리트머스 테스트가 되었다. 아마도 이런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다른 원천이 말라버렸고, 정치적으로 언급할만한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민족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종교나 민족성과 깊숙이 뒤엉켰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민족주의는 긍정적 측면에서 공개적이며 자랑스럽게 묘사됐다.

그러나 서구사회가 더욱 다양화하고 그들 사이에 거주하는 소수 그룹들이 자체적인 정체성을 주장하면서 민족주의를 오래된 재료로 정의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면 과거의 민족주의 개념에서 세계화 시대인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가? 국가는 또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미국인들에게 정치적 아이디어와 이념은 늘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은 “미국인답지 않은 짓”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미국에도 이념 너머로 국가라는 보다 감정적인 개념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민은 그 같은 본능적 감정(gut feelings)의 대용물(proxy)이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본능적 감정 혹은 직감이란 국가는 스스로를 규정하고, 누구에게 입국을 허용할지 선택하며, 외국인보다 자국민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감정적 사고를 포함한다.

미국의 망가진 이민 시스템에 대한 해법은 복잡하다. 그러나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가 결코 잊지 않았던 평범한 상징성을 기억한다면 민주당은 잘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민과 관련한 클린턴과 오바마의 수사와 행동이 지금의 많은 민주당 지도자들에 비해 훨씬 중도적이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치에 있어 사람들은 불과 몇 가지 단순한 일들만을 기억한다. 1980년대에 활동했던 한 여론조사전문가는 이를 도식적으로 입증해주는 이야기 한마디를 들려주었다.

어떤 포커스 그룹의 조사원이 한 남성에게 로널드 레이건과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월터 먼데일 가운데 누구를 찍을 것이냐고 물었다.

그 유권자는 “레이건”이라고 대답했다. “먼데일은 공산주의자”라고 그는 덧붙였다. 조사원은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해주었다. 남성유권자는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레이건을 찍겠다. 레이건이 빨갱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기 때문이다”고 응수했다.

도널드 트럼프는 이번 라운드에서 패배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불법이민에 물렁하게 대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글/파리드 자카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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