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힘

미국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명문가 출신이거나 대지주였다. 버지니아에서 가장 많은 땅을 갖고 있었다는 조지 워싱턴, ‘독립 선언서’를 쓴 토머스 제퍼슨, 연방 헌법을 기초한 제임스 매디슨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2대 대통령을 지낸 존 애덤스는 대지주는 아니었지만 명문가 출신으로 하버드를 나온 잘 나가는 변호사였다.

그런 면에서 알렉산더 해밀턴은 특이한 존재다. 카리브해의 작은 섬 네비스에서 스코틀랜드 출신 아버지와 프랑스계 어머니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12살 때 어머니마저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사실상 고아로 지냈다. 친척집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와중에 허리케인까지 덮쳐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꽃이 피기도 전 시들려는 순간 구원은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그의 재주를 알아본 이웃 주민이 장학금을 모아 지금 컬럼비아 대학 전신인 뉴욕의 킹스 칼리지로 유학을 보내준 것이다. 1775년 미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뉴욕 민병대에 자원하며 결국 워싱턴의 부관이 돼 1781년 독립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지은 요크타운 전투를 진두지휘한다.

독립은 얻었지만 주 정부의 연합체인 연합 정부는 아무 힘도 없고 전쟁을 치르는 동안 발행한 정부 채권은 휴지로 전락했으며 대니얼 셰이스가 불만에 찬 농민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키는 등 혼란이 계속됐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 정부 수립을 근간으로 하는 연방 헌법이 마련됐으나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 강해 13개 주의 비준을 얻을 수 있을 지가 불투명한 상태였다. 이 때 나온 것이 연방 헌법의 필요성을 역설한 ‘연방주의 논고’다. ‘연방 헌법에 대한 가장 뛰어난 해설서’로 불리는 이 글들은 헌법 비준에 열쇠를 쥔 뉴욕 유권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신문에 실린 글 들을 모은 것으로 총 85편인데 이중 52편이 해밀턴이 쓴 것이다.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그는 해밀턴을 재무장관으로 발탁한다. 해밀턴은 미 중앙 은행을 설립하고 전쟁 중 각 주정부와 연합 정부가 발행한 채권을 연방 정부가 보증하는 안을 관철시킨다. 이에 반대하던 제퍼슨, 매디슨과 저녁 회동을 통해 이들의 고향인 버지니아 인근에 연방 정부 새 수도를 수립하는 조건으로 채권 보증안 지지를 얻어낸다. 이로써 연방 정부의 재정은 반석 위에 올라선다.

그러나 탄탄대로를 걷던 그에게 꽃뱀 스캔들이 터진다. 남편에게 학대 받던 마리아 레이놀즈라는 여성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그의 구좌에서 돈이 빠져 나간 사실을 알아낸 정적들이 이를 추궁하자 해밀턴은 불륜 사실을 시인하며 스스로 사건의 전모를 밝힌 ‘레이놀즈 팸플렛’을 발간한다. 이와 함께 그의 정치적 생명도 끝난다.

불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큰 아들 필립이 아버지의 명예를 모욕한 인물과 결투를 벌이다 사망하고 그 2년 뒤인 1804년에는 자신을 모욕했다며 결투를 신청한 아론 버 부통령의 총에 맞아 해밀턴이 49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그의 아내 일라이자는 그 후 50년을 더 살며 뉴욕 최초의 고아원을 세우고 남편의 업적을 기리는 활동을 하다 97세에 세상을 뜬다.

이처럼 극적인 그의 인생을 그린 뮤지컬 ‘해밀턴’이 미국 전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푸에르토리코 출신 이민자를 부모로 뉴욕에서 태어난 린-마누엘 미란다가 만든 이 작품은 ‘건국의 아버지’ 역에 흑인 배우를 내보내고 강한 리듬의 랩과 힙합으로 미국 역사를 조명해 충격적이고 신선하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2016년 뮤지컬 부문 퓰리처와 그래미, 그리고 11개 부분 토니 상을 받았다. 지난 8월부터 LA 팬테이지스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데 티켓 최고가가 2,000달러가 넘는데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그러나 음악 형식이 한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데다 영어 대사를 알아듣기 힘들어 미국 역사와 가사에 대한 상당한 공부가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극장에서 한인들의 모습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민자 출신 ‘건국의 아버지’ 이야기를 이민자 출신 가정의 음악가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에 흑백 모두가 열광한다는 사실은 트럼프로 상징되는 낡은 미국의 마지막 비명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임을 재확인시켜준다.

<한국일보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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