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의 연방대법원

‘폭풍 전의 고요(the calm before the storm)’ – 지난주 별 뉴스 없이 끝난 연방대법원의 2016~2017년 회기를 USA투데이도, 워싱턴포스트도 이렇게 표현했다.

지난 5년간 매 회기마다 ‘역사적 판결’을 잇달아 쏟아낸 대법원의 6월말이 그 흔했던 법원 앞 시위 한 번 없이 ‘지루했던’ 것도 이례적이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대형폭탄’급 이슈들을 다음 회기에 상당수 포진시켜 자아내는 폭풍전야의 긴장감이다.

지난해 10월 회기시작 때만 해도 대법원의 지각변동이 예고되었다. 보수파의 거두 앤토닌 스칼리아 대법관의 갑작스런 사망이후 오바마 대통령이 후임으로 지명한 메릭 갈랜드 판사가 상원의 인준 청문회도 받지 못한 채 몇 개월째 대기 상태였지만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이 우세해 보이는 상황에서 민주당은 수십년만에 ‘진보 대법원’의 부활을 꿈꾸고 있었다.

예상을 뒤엎은 트럼프의 대선 승리로 대법원은 49세 젊은 보수 닐 고서치 판사를 새 대법관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지금, 회기 마지막의 판세는 ‘저물어가는 보수 대법원 시대’를 예상했던 시작과는 완전히 달라졌고, 진보 대법원의 꿈은 앞으로 상당기간 실낱같은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고서치의 입성은 보수진영에게 ‘홈런’이었다. 두 달 만에 가장 보수적이고 가장 직설적인 대법관의 하나로 자리 잡은 고서치는 ‘새로운 스칼리아’로 부족함이 없음을 증명했다. 그는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을 비롯해 총기권리, 정치자금, 정교분리 등 이념 대립 이슈들에 대한 판결과 심리여부 결정 등 모든 표결에서 확실하게 보수표를 던졌다.

대법원의 최연소 대법관인 그는 신참으로는 전례 없이 심리 질문에서도, 의견서 작성에서도 매우 능동적이었다. 취임 석 달도 채 안되어 소수의견서를 7번이나 작성했다. 서열 바로 위의 엘레나 케이건 대법관이 첫 2년에 썼던 의견서 숫자와 동일하다고 AP는 전한다.

고서치 취임 전까지 8명 대법관만으로 꾸려나가야 했던 대법원은 고서치 인준을 둘러싼 법정 밖 정치드라마에 휩쓸리지 않은 채 타협을 통해 될수록 전원일치를 끌어내며 결정 적용 범위를 한정적으로 축소하는 판결들을 내리는데 주력했다.

이번 회기에 가장 이념적 대립이 예상되었던 정교분리 케이스 역시 그랬다. 교회운영 학교가 운동장을 재포장하기 위해 정부기금을 신청했는데 주정부가 정교분리를 이유로 거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미주리 주 소송이었는데 만장일치는 아니었지만 7대2로 교회 승소 판결이 내려졌다. 진보 대법관 2명이 보수파 5명의 다수의견에 합류한 것은 이번 결정을 포괄적 종교 차별이 아닌, 운동장 재포장과 유사한 경우에만 적용하는 한정적 판결로 ‘타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협의 계절’은 이제 끝난 듯하다. 다시 5대4의 보수 우위를 회복한 대법원의 이념적 지형과 역사적 판결을 기다리는 논란이슈들이 다음 회기의 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대법원의 ‘폭발적 귀환’을 약속하는 가장 뜨거운 케이스 우선 세 가지다.

먼저 10월 개정과 함께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대한 위헌심리로 미 전국을 넘어 전 세계의 눈길을 끌어 모을 것이다. 종교적 차별을 금지하는 헌법은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대통령의 권한을 어느 선까지 허용 하는가의 해석이 나올 것이다.

다음은 6월22일자 칼럼에서 이야기한 게리맨더링 케이스다. 특정 정당에 유리하도록 조작된 선거구 획정에 대한 소송으로 위헌 판결이 나올 경우 정치 양극화 해소에 첫 걸음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또 하나는 동성애자 권리와 상인의 종교적 자유가 충돌한 웨딩케이크 소송이다. 동성커플의 웨딩케이크 주문을 종교적 신념 때문에 거부한 빵집 주인이 콜로라도 주의 차별금지법 위반으로 고소당해 패소한 후 헌법에 보장된 종교자유를 근거로 상고한 것이다. 연방대법원에서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이 나온 지 벌써 2년이 지났는데 동성애자 권리가 다시 법정에 서게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폭풍 경보는 충분한데 핫이슈들은 계속된다. 범죄용의자의 셀폰 녹음을 둘러싼 경찰의 수색권과 사생활 침해, 스포츠 도박과 피난처 도시 등으로 연방에 도전하는 주정부의 권한…여름 동안 푹 쉬고 10월이 오면 “안전벨트를 매라”고 조나단 애들러 케이스웨스턴 법대 교수는 조언한다.

금년회기 마지막 판결이 나온 지난주, 진보진영의 등골을 서늘하게 한 대법원 최대뉴스는 앤소니 케네디 대법관의 은퇴설이었다. 5명 보수 대법관 중 가장 ‘진보적’인 중도파로 상당수 이념대립 이슈에서 5대4의 진보적 판결을 이끌어낸 스윙보트 케네디의 은퇴는 연방대법원의 ‘절대 보수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후임에 고서치보다 더 강경한 보수파를 지명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행히’ 은퇴설은 루머로 판명되었고, 최소한 폭풍의 다음 회기는 그나마 균형 잡힌 ‘케네디의 법정’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트럼프가 무효화를 천명했던 낙태권과 동성결혼이 여전히 합법이고,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의 운명이 미지수인, 이 사회 마이너리티들에게도 살만한 세상이 아직 계속될 것이란 의미다.

<한국일보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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