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와 로버츠 대법원

2016년 대선에서 “개인적으로는 트럼프가 싫어도 그를 찍어야 한다”며 공화당 표를 결집시킨 주요이슈 중 하나가 ‘연방대법원’이었다. 9명 대법관 중 5대4의 보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그 전략의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선거 전에 사망한 보수 대법관 앤토닌 스칼리아의 빈자리에 더해, 주요이슈에서 종종 진보에 합류하는 스윙보트로 보수진영의 신경을 긁던 중도 보수 앤서니 케네디의 은퇴로 트럼프 대통령은 ‘확실한 보수로 검증된’ 2명의 젊은 대법관을 대법원에 입성시켰다.

같은 5대4 구도라도 보수성향 더 강해진 대법원에서 드라마틱한 ‘우향우’ 판결이 속출하는 획기적 변화를 기대했던 보수진영에게, 그러나 지난달은 ‘우울한 6월’이었다.

대법원 회기의 클라이맥스인 6월 후반 2주 동안 낙태. 이민, 성소수자 권리의 핫이슈 3건에서 진보 승리의 판결이 잇달았다. 정통 보수 존 로버츠 대법원장의 진보파 합류가 결정적이었다.

각 판결의 법적 근거는 명확했다. 15일의 직장 내 성소수자 차별금지 판결은 민권법의 직장 내 성차별 금지조항을 확대 적용한 것이었고, 18일 트럼프의 다카 폐지 패소는 연방 행정절차법 위반 때문이었으며, 29일의 루이지애나 주 낙태규제법 무효화는 4년 전 거의 동일한 텍사스 주법에 무효화 판결을 내린 대법원의 판례를 존중한 ‘선례 구속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동시에 로버츠는 트럼프와 보수의 승리판결에도 적극 합류했다. 소비자금융보호국에 대한 대통령 통제권을 확대시켰고, 밀입국자들을 재판 없이 신속 추방시킬 수 있는 대통령 권한을 인정했으며, 기독교 사립학교에 대한 정부 혜택을 정당화시킨 판결에도 결정적 표를 행사했다.

그러나 대표적 이념대결 소송에서 잇달아 패한 보수의 분노는 ‘배신자’ 로버츠를 향해 폭발했다. 공화당 연방의원들도 로버츠가 “자신이 원하는 정책결과를 얻기 위해 정치게임을 하고 있다” “차라리 사임하고 출마하라”며 ‘대법원의 정치화’라고 비난을 쏟아냈다.

전에도 두 차례나 오바마케어 합헌 판결을 내리고 트럼프의 센서스 시민권 질문 추가 계획을 막았던 로버츠에게 좌절한 보수 일각에선 대법원장의 행보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트럼프에 대한 혐오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추론도 제기됐다. 트럼프 자신도 다카 판결 후 트윗 대응을 통해 “당신들 생각에도 대법원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냐?”라고 물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라고 하버드 법대 노아 펠드먼 교수는 말한다. 그가 블룸버그 뉴스 기고를 통해 전하는 로버츠와 트럼프의 관계 악화 과정이 흥미롭다.

트럼프 집권 초기 로버츠는 대통령 권한을 존중하며 트럼프와 무언의 협상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전제한 그는 “만약 트럼프가 법원을 존중하고 자신의 정책을 적절한 법적 방법을 통해 실현시키려고 했다면 로버츠는 스윙 보트로 대통령의 결정을 지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로버츠가 제시하는 암묵적 협상에 순순히 응한 적이 없었다”라고 지적했다.

사법부 비난을 계속하던 트럼프가 2018년 자신의 반이민 행정명령을 막은 연방 판사를 ‘오바마 판사’라고 공격하자 로버츠가 공개성명을 통해 “오바마 판사, 트럼프 판사, 부시 판사, 클린턴 판사란 없다. 동등권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헌신적 판사들만 있을 뿐이다”라고 강력 반박하는 이례적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그 후 로버츠는 트럼프의 법치 공격엔 사법부 감독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듯 했고 다카 판결은 그 감독 권한의 전형적인 예”라고 설명한 펠드먼은 탄핵재판 주재 등을 통해 “트럼프가 법치 자체를 존중하려는 뜻이 전혀 없다는 것”을 계속 보아온 로버츠의 한 표는 이제 “트럼프 행정부의 합법성을 감독하는 법원의 역할 관련 재판에선 트럼프 행정부의 반대쪽에 던져질 가능성이 높을 것이며 그것은 트럼프가 자초한 불신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트럼프 대통령과 로버츠 대법원장

민주당 대통령 오바마와는 사소한 이견 대립에 그친데 비해 같은 공화당 대통령 트럼프와는 격렬한 충돌로 치닫고 있는 로버츠의 의도를 해석하는 시각은 여러 갈래다.

정치적 문화적 압력에 너무 민감하다는 비난도 있고 진보파로 변했다는 의심도 받는다. 그러기엔 투표권법 축소에서 선거자금 규제완화, 트럼프의 무슬림 입국금지령 합헌에 이르기까지 그가 이끌어낸 선명한 보수 판결이 너무나 많다. 그의 보수 합류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은 그가 일관되게 강조해온 사법부의 독립성 옹호다. 양극화의 정치 환경에서 ‘불편부당한 대법원’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노력의 반영이라는 시각이다. 실제로 정부 3부 중 여론이 가장 신뢰하는 것은 사법부다. 지난 10월 마켓법대 여론조사에 의하면 57%가 연방대법원을 가장 신뢰한다고 답했다. 연방의회는 22%, 대통령은 21%에 그쳤다.

지난 회기부터 드러난 로버츠 대법원장의 스윙 보트 입지는 앞으로 더욱 굳어지고 그는 미국 중대 이슈 상당수의 향방을 최종 결정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재선으로 연로한 진보 대법관 중 한명이라도 강경 보수로 대체된다면 로버츠의 스윙 보트는 힘을 잃게 된다. 조 바이든이 당선될 경우엔 5대4 보수 우위구도 그대로 로버츠의 영향력이 지속될 것이다. 그건, 정치화를 지양하고 공정한 대법원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그의 노력이 계속되는 한 이민과 소수계 등 미 사회의 약자들이 기댈 수 있는 힘이다.

<한국일보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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