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전쟁

‘부시의 전쟁’에서 ‘오바마의 전쟁’으로 이어졌던 아프간 전쟁은 이제 ‘트럼프의 전쟁’이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21일 밤 미 역사상 가장 오래 끌어온 이 전쟁에 대한 자신의 전략을 발표함으로서 아프간에 미군 파병을 승인한 세 번째 대통령이 된 것이다.

9.11 테러 한 달 만에 미·영 연합군의 공습으로 시작된 아프간 전쟁을 자신의 과제로 받아들이는 “결정에 이르기까지 트럼프의 여정은 전임자 오바마와는 완연히 달랐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한다. 종전을 대선공약으로 내세웠던 오바마와는 달리 트럼프는 캠페인 중 아프간 전쟁을 거의 언급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2013년 트위터를 통해 ‘끔찍한 실책…전면 재난…완전 낭비’라며 “즉각 철수해야 한다”고 역설한 반대 입장을 대통령 취임 후에도 고수해 왔다.

그런 트럼프가 방향을 바꾼 것이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트럼프 백악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오랜 시간, 치열한 논쟁을 거듭하는 ‘철저한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였다.

금년 초 존 니컬슨 아프간 주둔사령관이 추가 파병을 촉구하면서 아프간 전쟁은 백악관의 과제로 떠올랐고 ‘트럼프의 장군들’은 새로운 전략 플랜을 작성해 몇 달 동안 관계 미팅을 거듭했지만 대통령은 계속 승인을 유보해 왔다. 아프간 개입에 대한 트럼프의 회의적 시각은 비밀이 아니지만 혐오에 가까운 반대엔 그의 국가안보팀도 놀랄 정도였다. “우린 패하고 있다. 당신들 플랜은 애매하고 무제한이다. 어떤 게 승리냐? 어떤 결과를 성공이라 할 수 있느냐?”고 대통령은 장군들을 몰아 붙였다.

치열한 논쟁 끝에 제시된 아프간 전략 옵션은 네 가지였다. 추가 파병으로 아프간 전쟁을 계속하거나, 완전 철수하거나, 아프간 개입의 주요 목적인 대 테러작전을 CIA가 주도하는 비밀작전으로 전환시키거나, 전쟁을 민간기업에 아웃소싱하여 용병을 투입하는 등의 선택이 주어졌다.

트럼프 캠페인의 대외정책인 고립주의 노선을 대변하는 스티브 배넌 수석전략가는 용병 옵션을 강력 추천했고, 전통적 개입주의를 강조하는 장군들은 추가 파병을 간곡히 권고했다.

결과는 장군들의 승리였다.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과 H.R.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 그리고 후에 합류한 존 켈리 비서실장까지 무질서하게 휘청대는 트럼프 행정부에서 그나마 ‘안전망’ 역할을 하며 중심을 잡고 있는 ‘트럼프의 장군들’이 현 시점에서 왜 철수가 위험한가를 설명하며 대통령을 설득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무엇보다 미군이 철수하면 아프간은 테러리스트의 기지로 정착하여 알카에다나 IS 같은 테러그룹이 발호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며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는 경고가 유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금요일 캠프 데이빗에서 열린 최종회의에서 트럼프는 추가 파병을 포함한 새로운 전략 플랜에 서명했고 안보팀은 엄숙한 표정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반대의 선봉에 섰던 배넌이 백악관에서 쫓겨난 날이었다.

21일 밤 트럼프가 발표한 새 아프간 전략의 내용 자체는 그리 새롭지 않다. 아프간 국가 재건 아닌 테러세력 근절, 이중 플레이를 해온 파키스탄에 대한 압박 강화 등을 핵심으로 하는 이번 플랜은 구체적 작전보다는 희망사항을 강조한 것이며 이미 ‘오바마의 전쟁’에서 수 없이 들어온 전략을 조금씩 수정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특기할 만한 사항이 별로 없다.

그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특기인 즉흥적 트윗이 아닌, 철저한 논의를 걸쳐 합의된 국정방향을 대국민 연설을 통해 진지하게 발표했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평소 주장을 접고 정치적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통수권자의 의무를 인정하는 대통령의 자세를 보인 점이다. “내 본능은 철수였고 난 본능을 따르는 걸 좋아하지만 대통령 집무실 책상에 앉아서 내리는 결정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익히 들어왔다”고 그 자신도 연설에서 시인했다.

아프간 전쟁에서 부시나 오바마가 절감했듯이 트럼프에게도 편한 출구는 없을 것이다. 승리를 무엇보다 사랑하는 현 대통령은 이번 연설에서도 ‘승리’라는 단어를 몇 차례나 반복하며 싸워 이길 것을 장담했으나 완벽한 승리는 거의 불가능하며 “승리할 수는 없어도 패배해선 안 되는 전쟁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이미 16년이나 끌어온 아프간 전쟁을 트럼프 역시 자신의 후임자에게 물려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물론 테러공격을 사전에 예방하는 성공적 작전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익을 위해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정책을 수행하는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와 응원도 (아무리 전쟁이 지겹다 해도) 살아있을 것이다. 트럼프의 지지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새 아프간 전략에 대해 비판을 자제하며 지켜보려는 이유다.

그런데, 21일 밤 아프간 전략발표를 통해 파병군인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조국을 위해 싸우는 영웅들을 본받아 우리도 단합하며 서로를 포용해야 한다”고 ‘대통령답게’ 연설을 마친 트럼프는 바로 다음 날 애리조나로 날아가 가진 집회에선 인종갈등을 증폭하는 분열적 발언을 마구 쏟아 놓았다.

미국은 지금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두 얼굴의 대통령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한국일보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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