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첫 100일과 남은 1,360일

미국 신임 대통령의 첫 성적표가 나오는 ‘취임 100일’의 전통은 84년 전 프랭크 루즈벨트에서 시작되었다. 대공황의 와중에서 쏟아져 나온 루즈벨트의 파격적인 위기극복 대책들은 국민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고 의회는 첫 100일에 수십건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루즈벨트의 실적을 잣대로 삼기는 힘들지만, 이후 국민과 의회가 새 리더에게 호감을 갖는 허니문 기간인 ‘첫 100일’은 대통령의 주요입법 실현의 기회로 활용되어 왔다.

지지율 사상 최저에 공화당 주도 의회와도 오월동주의 아슬아슬한 관계여서 허니문은 아예 갖지도 못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100일 실적은 기대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다. 트럼프 자신도 100일을 ‘웃기는 기준’이라고 깎아내렸다.

그러나 ‘100일’을 중요한 이정표로 강조한 것은 트럼프 자신이었다. 대선 캠페인에서 그는 수차례 ‘100일 플랜’을 구호처럼 외쳐왔고 선거 18일 전 게티스버그 유세 때엔 ‘도널드 트럼프와 유권자의 계약’이라며 첫 100일 어젠다로 28개 공약을 제시했다. 연방의원들의 임기를 제한하는 헌법 개정에서 부터 어제 발표된 세제 개혁안에 이르기까지 야심찬 이 ‘게임 체인징’ 플랜은, 그러나 거의 실현되지 못한 상태다.

그래서 29일로 취임 100일을 맞는 트럼프의 백악관은 요즘 가장 분주한 한 주를 보내고 있다. 한편으론 깎아내리면서도 “나보다 더 실적 올린 대통령은 없었다”며 자화자찬하는 트럼프의 우수한 100일 성적표를 위해 전력투구에 나선 것이다.

매일 매일, 아니, 매시간 마다 터져 나오는 백악관 발 뉴스를 쫓아가느라 숨이 가쁠 정도다. 연방대법관 인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탈퇴, 오바마시대의 규제 폐지 등 첫 100일 업적을 조명하는 웹사이트를 여는 한편 주말 시사토크쇼엔 백악관 참모들과 장관들이 대거 출동하여 홍보작전을 펼쳤다.

주초 사흘 동안도 정신없이 바빴다. 임시예산안 통과를 위해 고집해온 국경장벽건설 예산을 유보시키며 정부폐쇄 막기에 나섰고(공화당 천하에서 정부가 폐쇄된다면 누가 비난을 받을 것인가), “더 좋아졌고, 정말 좋아져 많은 사람들이 아주 많이 좋아한다”는 트럼프케어를 되살리기 위해 괘씸한(?) 극우보수파를 달래서 지지를 얻어냈으며, ‘피난처 도시’ 연방예산 지원중단 행정명령에 제동을 건 법원에 맹비난을 퍼부었고, 홀로코스트 추모행사에 참석해 “편견을 추방하고 증오를 규탄한다”(유대인에 대해서만?)고 역설했다.

상원의원 전원을 백악관에 초청해 북한 정책을 설명하고 외교안보팀의 대북 합동성명까지 발표한 어제, 트럼프 행정부는 사상 최대의 감세라는 대규모 세제개혁안도 공개했다. 국가안보에 대한 긴급한 위협이며 “외교정책 최우선 순위”라는 대북 기조와 일자리 창출 위한 “최우선 국내 과제”라는 세제개혁안을 같은 날 발표하는 이례적인 ‘그 어려운 일’을 트럼프 행정부가 해낸 것이다!

“무책임하고 수치스러운…거의 도둑질 수준의 부유층 세금 혜택”이라는 비난은 진보진영의 공격이라고 치자. 그러나 대규모 감세를 어떤 세수입으로 충당할 것인가, 천문학적 숫자로 늘어날 적자는 어떻게 메울 것인가 – 가장 기본적 질문에 대한 해답조차 명시하지 않은 채 밀어붙이는 ‘설익은’ 세제개혁안이 의회를 통과할 가능성은 보통사람들 눈에도 영 낮아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100일에 대한 표밭의 반응은 성향에 따라 정반대다.

‘편견과 공포와 분열’을 우려하며 기대는커녕 트럼프 발 위기만이라도 피하고 싶다는 민심을 존 매케인 상원의원 전 보좌관 마크 솔터는 이렇게 풍자했다 : “(통치가 뜻대로 안 되는 것에 불평하고, 안보는 국방장관에게 맡기고) 편하게 지내세요, 대통령님. 마라라고에서 더 많이 시간을 보내세요. 골프도 더 치세요. 트윗도 계속하세요. 그러면 1,460일이 끝나는 날, 이 위대한 국가는 당신이 ‘최악’을 행하지 않은 것에 감사할 겁니다”

워싱턴의 강한 반격이나 호된 미디어의 비판에는 아랑곳없이 ‘자긍과 힘과 희망을’ 말하는 트럼프 지지층의 충성은 변하지 않았다. 그에게 표를 준 유권자의 96%가 투표를 다시 한다 해도 그를 찍겠다고 말한다. 입법 실적이 미미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제 기능 못하는 워싱턴 기득권층과 편향된 미디어의 탓이라고 주장한다. 여전히 이들에게 어필하는 트럼프의 능력과 전략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역사학자 줄리언 젤리저는 경고한다.

중도시각의 객관적 평가는 냉정하다. “이룬 것 별로 없는 비생산적인 좌충우돌 100일”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다. 그러나 트럼프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루즈벨트 시대의 대공황처럼 국가 비상시기도 아닌데 ‘100일’은 무의미한 기준일 수 있다.

아직 1,360일이 남아있지 않은가. 초반의 좌절을 만회할 시간은 충분하다. LA타임스의 도일 맥마너스가 초반 실패 극복에 성공했던 빌 클린턴 백악관 참모들의 조언을 정리해 트럼프를 위한 세 가지 플랜을 제시했다 :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하라. 백악관을 재정비하라. 통치연합을 초당적으로 확대하라.

아직은 ‘좋은 통치’보다 뉴스 각광에 관심 많은 대통령이니 문제 인식부터 거부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러나 첫 100일에 대통령 트럼프가 보여준 한 가지는 확실하다 – “승리를 위해선 기꺼이 마음을 바꿀 수 있다!”

이념에도, 당론에도 큰 관심 없는, 사실상의 무소속 대통령인 트럼프의 최대 가치는 ‘승리’다. 승리에 대한 그의 집착을 희망의 근거로 삼고 견딘다면 1,360일도 그런대로 지나갈 것이다.

<한국일보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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