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장벽 건설·반이민’ 대립 美-멕시코 한달…’잠시 휴전’

장벽 건설비 갈등 고조로 정상회담 취소…공론 자제 정상통화 후 진정
멕시코 결집 속 중남미 등 세계 우려…멕, 자국 이민자 보호 준비
나프타 재협상 등 갈등재연 가능성 여전…실무접촉으로 해법 모색

(멕시코시티=연합뉴스) 국기헌 특파원 = 지난달 2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 이후 국경장벽 건설과 멕시코계 이민자를 표적으로 한 반이민 정책 등을 놓고 격화하던 미국과 멕시코 간의 대립이 숨 고르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국경장벽 건설 행정명령을 계기로 고조된 양국 갈등은 지난달 말로 예정됐던 정상회담이 취소된 후 양국 정상이 국경장벽 건설과 관련한 공개 발언을 자제하기로 합의한 뒤 수면 아래로 잠시 가라앉은 형국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장벽 건설비용 부담 주체 문제를 다시 공론화하거나 멕시코계 불법 이민자들을 상대로 단속을 강화하는 등 다시 ‘시한폭탄’의 뇌관을 건드릴 경우 양국 간 갈등은 언제든지 다시 폭발할 수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ㆍ나프타) 재협상이나 멕시코산 제품에 대한 국경세 부과를 놓고 자국 이익을 지키기 위한 양국 간 팽팽한 힘겨루기도 이어질 것으로 보여 언제든 갈등 기류가 다시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

◇ 국경장벽 행정명령에 정상회담 취소…정상통화 후 ‘임시휴전’

국경장벽 건설은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건 만큼 그의 당선 이후 실행이 예견됐던 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운동을 펼치면서 멕시코인들을 강간범과 범죄자로 비하하며 불법 이민자들의 유입을 막기 위해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건설하겠다고 공언했다.

멕시코 현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표를 공략하기 위한 대선용 수사일 뿐 당선 이후엔 현실적인 요인을 감안, 실제로 추진하더라도 형식적인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5일만인 지난달 25일(현지시간) 국토안보부를 방문해 미국과 멕시코 국경 3천144㎞에 장벽을 건설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하자 분위기는 급변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명령 서명 이튿날인 26일 트위터에서 멕시코가 장벽 건설비용 부담을 끝내 거부할 경우 양국 간 정상회담을 하지 않겠다는 ‘경고’ 메시지를 보내자, 엔리케 페냐 니에토 대통령은 같은 달 31일로 예정된 정상회담 취소로 맞대응했다.

치닫던 갈등은 27일 미국과 멕시코 양국이 정상 간 전화통화에서 국경장벽 비용 부담과 관련한 공개적인 발언을 당분간 중단하기로 합의하면서 일단 봉합됐다.

그러나 두 정상 간 외교적 갈등이 ‘허울뿐인 화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상 간 전화통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니에토 대통령에게 “‘나쁜 놈들’을 막지 못하면 미군을 내려보내겠다”며 원색적인 표현으로 ‘위협’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방정부 예산을 우선 투입해 장벽을 신속하게 건설한 뒤 추후 멕시코에 건설비용 상환 청구를 한다는 방침이지만 멕시코는 단 한 푼도 내지 않겠다는 입장이 확고한 만큼 건설비용을 둘러싼 갈등은 재연될 소지가 크다.

트럼프 행정부는 오는 4월께 미 의회에서 장벽 건설비용 관련 법안이 통과되면 바로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다.

멕시코 불법 이민자의 송금을 막고 멕시코 수입품에 대한 20% 관세 부과 등의 조처를 통해 나중에 멕시코가 비용을 되돌려 받는 방식을 구상하고 있다.

멕시코는 보복 관세, 옥수수와 고기 등 미국산 주요 농축산물 수입을 중남미 등 다른 국가로 대체하는 방안 등을 통해 맞설 방침이다.

양국은 갈등이 진정되자 해법 모색에 나섰다.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과 존 켈리 국토안보부 장관이 오는 23일 멕시코를 방문해 나프타 재협상, 국경장벽 건설, 이민자 문제 등 현안을 주제로 실무접촉을 한다.

◇ 결집하는 멕시코…중남미 등 세계 연대 움직임

트럼프 대통령의 ‘멕시코 때리기’에 멕시코가 하나로 뭉치고 있다. 트럼프 반 멕시코 정책은 국경장벽 건설, 나프타 재협상, 멕시코산 제품에 대한 관세 부과, 멕시코 출신 불법 이민자 추방 등으로 요약된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관계가 수십 년 만에 최악으로 치달은 미국과 멕시코의 대립이 멕시코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한 것이다.

실제 스타벅스, 코카콜라, 맥도널드 등 미국 기업을 보이콧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으며, 많은 멕시코인이 소셜미디어 프로필 사진으로 멕시코 국기를 내걸고 있다.

정치권을 중심으로는 지금껏 멕시코가 해온 중남미 이민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그만두고 마약밀매, 테러와의 전쟁에서도 미국에 협조하지 말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12일에는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를 비롯해 과달라하라, 몬테레이, 모렐리아 등 20개 도시에서 2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의 국경장벽 건설 등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다.

추락을 거듭하던 니에토 대통령의 지지율이 미국과의 갈등에 힘입어 반등한 점은 멕시코 국민들의 위기의식을 잘 보여준다.

지난달 31일 멕시코 일간 엑셀시오르가 여론조사기관 BGC에 의뢰해 실시한 조사결과를 보면 지난 1월 11일 기준으로 11%였던 니에토 대통령의 지지율이 30일 현재 16%로 올랐다.

국경장벽 건설과 나프타 재협상, 멕시코산 제품에 대한 관세 부과 등 반 멕시코 정책 구상을 속속 실행하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반감을 보인 비율은 무려 88%에 달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국경장벽 건설 강행에 직접 이해 당사국인 멕시코는 물론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 세계 각국이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남미 12개국이 참여하는 남미국가연합(UNASUR)은 국경장벽 건설을 둘러싼 양국 갈등이 고조되자 미국을 향해 “모욕적인 장벽을 설치해 중남미를 물리적으로 분리하려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페루와 콜롬비아는 국경장벽에 반대하는 멕시코와 함께 서 있겠다고 다짐했으며, 통일 독일의 상징인 베를린의 미카엘 뮐러 시장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지 말라고 촉구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도 테헤란에서 열린 관광 관련 국제행사에서 “오늘날은 국가와 국가 사이에 벽을 쌓는 시대가 아니다”라고 비판했고, 교황청도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를 잇는 다리를 만들어야지, 벽을 세워서는 안 된다”고 우려했다.

◇ 美 불법 체류자 단속에 이민사회 ‘술렁’…멕시코, 이민자 보호 지원

미국에 거주하는 불법 체류자들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특히 불법 체류자들의 대부분은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 출신으로 기피업종에 주로 종사하고 있다. 미국에 거주하는 멕시코 출신 이민자는 3천5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은 최근 미국의 6개 대도시와 12개 주에서 불법 체류자에 대한 대규모 단속에 나서 680명을 체포하면서 미국 내 이민자 사회는 ‘추방작전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이며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서 300만 명의 불법 체류자를 추방하겠다는 공약을 지난 대선 기간 내걸었다.

특히 이번 단속이 멕시코를 비롯해 중남미계 이민자를 겨냥했다는 관측이 확산하면서 히스패닉 이민사회 전체가 불안에 떨고 있다.

미국에 건너온 지 20년이 넘는 멕시코 여성이 일상적인 체류 지위 체크를 위해 제 발로 ICE를 찾았다가 그대로 붙잡혀 추방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멕시코 외교부에서 ‘주의하라’는 성명이 나오기도 했다.

향후에도 불법 이민자 추방을 공약한 트럼프 대통령이 단속 강도를 높일 것으로 예상되면서 멕시코에서는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미국인에게도 비자 발급을 촉구하는 온라인 청원운동이 일고 있다.

멕시코 정부는 미국에 거주하는 자국 출신 불법 이민자들의 대규모 추방을 준비하고 있다.

멕시코는 지난달 30일 최근 추방 위기에 놓인 불법 체류자를 지원하기 위해 5천만 달러(575억 원)의 예산을 주미 멕시코 영사관에 배정했다.

멕시코시티, 과달라하라, 시우다드 후아레스와 미 시카고 등 4개 도시의 시장도 최근 시카고에서 만나 멕시코 출신 불법 체류자의 소송을 지원하는 등 권리보호에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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